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 역대 최고의 멀티버스!
*이 글은 2023년 6월 21일 개봉한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Spider-Man: Across the Spider-Verse)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지 않은 분들은 필히 감상 후에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스파이더-버스(Spider-Verse)
마블의 멀티버스 사가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기점으로 생명력이 다했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토니 스타크를 비롯한 원년 멤버들의 퇴장은 팬덤의 대거 이탈로 이어졌고, 평행우주와 시간여행은 더 이상 신선한 소재가 되지 못한다. 마블 영화 한 편의 빌드업을 위해 장대한 드라마 시리즈가 제작되며, 그 드라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전에 나온 영화도 봐야 하는 무한 순환 구조. 1기 멤버들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는 만들지 못한 채 멀티버스 세계관으로 인한 자가당착에 빠진 최근 마블의 행보는 관객에게 피로와 권태를 안겨주고 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스어유)는 작품명에서 알 수 있듯 멀티버스의 다양한 스파이더맨이 총출동한다. 나는 다시금 마블식 멀티버스의 권피한 화법이 반복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함께 지난 2018년에 개봉한 1편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상하길 주저했다. 이는 객쩍은 기우에 불과했다. <스어유>를 보고 나니 최근 마블의 연이은 멀티버스 실패작들이 대중에 각인되어 이 영화의 국내 흥행에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단 생각마저 들었다. 1회차 관람 후 스파이더-버스가 선사하는 무궁무진한 매력에 이끌려 왓챠에서 시리즈 1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스뉴유)를 감상했고, 최근 극장 3회차 관람까지 마쳤다. 이 영화의 대단함함이 어떤 수준이냐 하면, 작년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 더불어 단언컨대 역사상 최고의 멀티버스 영화라고 해도 손색없다. 최근 마블이 그래왔듯 멀티버스를 단편적인 세계관의 일부로 허비하는 것이 아닌 형식과 내러티브로서 메타적으로 기능하는 작품의 고유한 정체성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스어유>는 멀티버스가 아니면 절대 이뤄낼 수 없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시각적으로나 이야기로나 멀티버스의 잠재력은 이렇게 쓰는 거야"란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에서도 과연 이 영화의 어떤 측면이 그토록 뛰어난지 잘 드러난다. <스어유>의 장점은 짧은 글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많기에 이를 일일이 서술하기보다는(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특별히 주요했던 몇 가지 포인트를 콕 짚어 소개하려 한다.
|THE NEW ORIGINAL, SPIDER GWEN
스파이더 그웬은 지난 2014년 제이슨 라투어와 로비 로드리게스가 공동 창작해 코믹스에 실은 새로운 스파이더 우먼 캐릭터다. 스파이더-버스의 막을 연 <스뉴유>에서는 주인공 마일스 모랄레스를 중심으로 인물과 세계관이 관객에 처음 소개되었고, 그웬은 비중 있는 조연 내지 히로인 포지션 정도로 인식되었다. 반면 <스어유>는 그웬과 마일스의 더블 주인공 체제로 완전히 전환된다. 인트로는 그웬이 피터를 어떻게 잃었는지에 대한 과거 회상과 함께 메리 제인 밴드의 드러머로서 밴드원들과 합주하며 시작한다. 그웬은 서서히 <위플래시> 엔딩씬처럼 드럼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아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눈과 귀를 닫아 버린다. 소중한 친구를 잃은 상처로 밴드원과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고, 남은 유일한 친구 마일스를 그리워 하지만 만나러 갈 수 없으며, 스파이더우먼으로서의 정체성조차 경찰인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모든 상황에서 절벽 끝까지 내몰린 그웬의 심리를 표현한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다. 연주 내내 나오는 음악은 오리지널 스코어의 마지막 수록곡 'Across the Spider-Verse(Start a Band)'로 동료들과 새로운 밴드를 꾸린 엔딩씬에 다시 나와 멋진 수미상관을 이룬다.
Let's do things differently this time. So differently. His name is Miles Morales. He was bitten by a radioactive spider, and he's not the only one. He hasn't always had it easy, and he's not the only one. And now he's on his own, and he's not the only one. You think you know the rest? You don't. I thought knew the rest, but I didn't. I didn't wanna hurt him, but I did. And... he's not the only one.
이번에는 다르게 시작해 볼게. 완전히 다르게. 이 애의 이름은 마일스 모랄레스야. 방사능 거미에 물렸는데, 그 애만 그랬던 건 아니야. 항상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 애만 그랬던 건 아니야. 그리고 이제는 홀로 서게 됐지. 그 애만 그런 건 아니고. 나머지는 알 것 같아? 아니야. 나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니더라. 그 애한테 상처주고 싶지 않았지만, 주고 말았어. 그리고... 그 애만 그런 것도 아니야
드럼을 치는 틈틈이 나오는 그웬의 독백은 관객에게는 오프닝에 등장하지만, 작중 시점에서는 영화의 모든 스토리가 진행된 이후에 해당한다. 오프닝과 엔딩이 연결되는 이유이며 <스어유>가 그웬의 성장과 심리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영화임을 뜻한다. 이 대사는 여러 방면에서 훌륭하다.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문장이 짧고 간결함에도 대사의 모든 분절이 오만가지 맥락으로 가득 차 있다. 이번 트릴로지 1, 2편의 모든 스파이더맨은 "Let's do this one last time"으로 자기소개를 시작하는데, 그웬은 이미 1편 <스뉴유>에서 자기소개를 마쳤다. 2편 <스어유>의 그웬이 '완전히 다르게' 시작하는 이유이다. 이는 1편의 주인공 마일스와 병치되는 2편의 주인공 그웬으로서 본연의 서사를 전달하겠다는 의미이며, <스어유>로 넘어오며 영화의 주인공과 서사 내용, 그 전달 방식까지 완전히 달라졌음을 관객에게 알린다는 의미도 지닌다. 구조적으로 살펴보자. "He's not the only one"은 총 4번 반복된다. 반복되는 대사를 제외하고 그 앞에 오는 구절만 모아보면 마일스 모랄레스가 방사능 거미에게 물림/항상 쉽지만은 않았음/이제는 홀로 서게 됨/상처를 받음. 이와 같은 네 가지 문장으로 이어지는데 앞의 세 문장은 1편 <스뉴유>의 스토리 요약이다. 간단히 요약한 전작 마일스의 서사는 "그 애만 그랬던 건 아니야"라는 대사를 통해 화자 그웬과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서사로 확장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후속작 <스비유>에서 마일스와 그웬의 화해가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을 시사한다. 이번엔 문장 하나하나 뜯어보자. 마일스를 소개하며 방사능 거미에게 물린 건 그만이 아니란 걸 말한다. 이는 표면적으로 화자 그웬이 스파이더맨으로서 대두될 차례임을 뜻하는데, 스크린에는 <스뉴유>에서 사망했던 마일스 세계의 피터 파커가 드럼을 치는 그웬의 모습과 교차된다. 그웬 뿐만 아니라 앞으로 무수한 스파이더맨이 등장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예고한다. 항상 쉽지만은 않았고/홀로 서게 됐다는 내용에서는 전작에서 마일스가 애런 삼촌을 잃었던 일과 함께 본작의 중후반부에 나오는 장면인 미겔이 마일스에게 캐논 이벤트를 설명하는 듯한 묘사가 아주 잠깐 나온다. 불행한 일을 마주하고 홀로 서게 되는 게 마일스뿐 아니라 모든 스파이더맨의 숙명임을 뜻한다. 또한 모든 스토리가 진행된 후 엔딩 시점에서 독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프닝 이후에야 나오는 사건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그의 나머지를 알고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모른다는 건 <스어유>의 이후 전개가 마일스가 변칙자(Anomaly)로서 가진 의외성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곳으로 향하리란 암시가 된다. 실제로 그웬은 미겔의 대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밴드(스파이더 소사이어티)를 벗어나고 싶지 않아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원래대로라면 곧 서장이 되어 공식 설정을 겪었어야 할 아버지가 경찰직을 내려놓았다는 말을 듣고 운명을 깨부술 마일스의 가능성을 전적으로 믿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일스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주고 말았다는 고백은, 절친 피터와의 일과 같은 실수를 일부 반복했음을 의미한다. 극 중 그웬은 마일스에게 "널 보러 가는 게 아니었다"며 홧김에 실언하고 마는데, 그를 찾아가지 않았던 이유와 내내 함구했던 공식 설정의 진상까지 전부 알게 된 마일스에게 그 말 그대로 되돌려받고 눈물을 글썽인다. 즉, 그녀가 소중한 친구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또 반복하고 말았다는 자기 고백과 뉘우침을 담고 있다. 인트로의 독백이 끝나고 그웬은 곡이 진작에 끝났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부르는 친구들의 말도 듣지 못한 채 '위플래시 모드'가 되어 드럼 스틱에 모든 감정을 분출해 낸다. 1편의 내용을 빠르게 복기함과 동시에 주인공과 서사의 전환을 이뤄내고 나아가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라는 작품명 그대로의 의미를 관통하는 메시지까지 우회적으로 담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벼랑 끝에 선 그웬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까지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게다가 이 독백이 엔딩과 수미상관으로 이어지는 엔딩 시점의 대사라는 것까지 완벽하다. 이 모든 걸 2~3분 남짓한 시간에 해내다니!
<스어유>는 그웬이 살고 있는 지구-65를 마일스의 지구-1610B와는 완전히 다른 색채로 꾸며낸다. 이는 원작 코믹스 커버를 고증하여 매우 섬세하게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2편이 그녀의 서사 전달에 초점을 맞췄음을 알 수 있다. 인트로 이후 그웬은 밴드를 관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귀갓길의 그웬은 평상복을 입었음에도 창문, 지하철 유리문에 수트를 입은 모습이 비친다. 그녀가 그웬 스테이시가 아닌 스파이더우먼으로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반쪽짜리 정체성을 하소연할 곳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 극 후반부 도로 집에 돌아올 때는 수트를 입고 있음에도 맨얼굴이 비친다. 이 연출은 초반과 완전히 대비되는데, 스파이더우먼이 아닌 아버지의 딸로서 가족과 화해하게 될 것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실은 그웬과 스파이더 우먼이라는 두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뜻으로 다가온다. <스어유>는 스파이더맨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정체성의 괴로움을 가족적 코드와 엮었고, 이를 방황하며 성장 중인 청소년 캐릭터에 효과적으로 풀어냈다. 성인이 되기 직전의 10대가 겪는 부모님과의 갈등과 봉합은 서사에 입체성을 더해 큰 공감을 끌어 낸다. 또한 그웬의 서사가 훌륭한 이유는 단순히 비중이 크기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그웬 스테이시라는 인물이 어떻게 다뤄져 왔는가? 순애보를 지키는 피터 파커의 여자, 시리즈에 따라서는 여러 썸녀 중 한 명으로 소비되어 왔을 뿐이다. 특히 그녀의 비극적인 죽음은 피터 파커의 상실감을 설명하는 장치로써,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딛고 일어난다는 전형적인 영웅적 서사의 밑거름으로 활용되었다. 스파이더맨의 그녀가 아닌 그웬 스테이시 본연의 캐릭터를 살려 입체적으로 조명한 작품을 접하기 상당히 어려웠다는 것. 우리가 '그웬'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장면은 엠마 스톤이 추락사하는 장면 아닌가. 재미있는 점은 그 상징성 때문에 본작의 그웬이 어디론가 떨어질 때마다 크게 다치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을 유발한다. 하지만 그녀는 '스파이더 그웬'이기에 기기묘묘한 곡예로 보란 듯이 위험을 피해 버린다. 설령 떨어지더라도 등만 좀 아프고 말겠지.
|'공식 설정(Canon Event)'입니다만?
스파이더맨이 그웬을 구했음에도 곧바로 미겔이 그웬을 낚아채 떨어트리는 위 영상을 보자. 해외 커뮤니티에서는 <스어유>의 '공식 설정(Canon Event)'을 하나의 밈으로 여겨 각종 해괴한 모티브를 갖다 붙이고 있다. 가장 유명한 건 9.11 테러 현장에 미겔이 나타나 공식 설정이니 막을 수 없다는 드립을 치는 짤이다. 이는 마일스에게 아버지가 죽는 걸 그저 지켜보라는 미겔의 강요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방증한다. 집단을 위해 개인이 현실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범위는 정해져 있다. 위선은 선이 아니고, 악법은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스파이더맨에게 큰 불행을 안겨주지만 스파이더-버스 전체의 안정과 존속을 위해 피할 수 없는, 피해선 안 되는 사건을 공식 설정이란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의 리더 미겔은 과거에 소중한 가족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이를 거스르다 지구 하나를 통째로 증발시켜 버렸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미겔은 개인이 다소 희생하더라도 대의를 위해 집단의 규칙을 따르도록 강권한다. 벤담, 밀로 대표되는 일종의 공리주의 메타포인 셈이다. 반면 마일스는 초래될 결과와 무관하게 행동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미겔은 주인공 마일스와 사상적으로 충돌을 이루는 반동 캐릭터로 자리매김한다. 세상 어느 누가 "모두의 안전을 위해 너의 아버지가 죽는 것을 두고 보라"는 불합리한 요구에 순순히 응하겠는가? 마일스가 누에바욕 대규모 추격전에서 다수의 숙련된 스파이더맨들에게 끝내 잡히지 않은 건, 어쩌면 그들이 전력으로 쫓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모두 논리적으론 미겔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속으론 마일스의 마음에 뼛 속 깊이 공감하고 있었을 테니. 스파이더 바이트는 고홈머신을 가동시켜 집으로 돌아가려는 마일스를 막고자 했으나 마음이 흔들려 결국 장치 재가동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는 엔딩에서 그웬의 밴드에 합류하는 것으로 완전히 마일스의 편(그웬의 말을 빌리자면 '좋은 편')에 서게 된다. 스파이더맨 소사이어티의 최초이자 유일한 변칙자가 된 마일스가 향후 3편에서는 그웬과 함께 리더가 되어 새로운 형태의 거미 군락을 조성할 것이라는 암시다. 왜냐고? 마일스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마일스만 있는 건 아니니까. "He's not the only one."
|상승과 하강의 <스파이더맨 라이즈>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는 상승과 하강이 반복되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세 작품 내에서 꾸준히 반복되며, 비긴즈-다크 나이트-라이즈로 이어지는 3부작의 구성도 크게 보면 상승-하강-상승의 구조를 띄고 있다. 비긴즈에서는 토마스 웨인과 알프레드의 상징적인 대사를 통해 강조하고 있고, 심지어 3부의 제목은 대놓고 라이즈이니 그리 꼭꼭 숨겨놓은 메타포는 아닐 것이다. 이번 스파이더-버스 트릴로지에서는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스파이더맨은 허구한 날 거미줄 타고 빌딩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쏘다니니까. 상승과 하강은 그저 시각적 볼거리가 아닌, 캐릭터의 존재 의의와 서사를 전달하는 장치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아래로 떨어져야만 다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박쥐. <배트맨 비긴즈> 속 브루스 웨인은 우물 아래로 떨어져 박쥐를 마주했던 유년 시절의 공포를 떠올려 직접 공포의 대상이 되기로 한다. 박쥐가 된 브루스 웨인은 영화 내에서 어디론가 내려갔다 올라가기를 무수히 반복한다. 악인을 응징하는 방식도 그렇다. 팔코네를 높은 곳에 매달거나, 부패 경찰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들어올리기를 반복하며 엄청난 공포를 선사한다. 상승과 하강은 영화적 기법을 넘어 그야말로 배트맨의 정체성 그 자체다.
스파이더-버스 트릴로지 역시 배트맨 못지않게 상승과 하강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주제 의식을 탁월하게 전달하고 있다. <스어유>만 봐도 미술관 지붕을 뚫고 상승-헬기와 함께 하강, 뭄바튼 알케맥스 연구소로 상승-싱 경감을 구하기 위해 하락, 대규모 추격전에서 달로 상승-다시 본부로 하강 등 영화 전체를 통틀어 빈번히 나타난다. 마일스가 하강하는 씬은 거의 모두 공식 설정에 반하는 행동을 할 때로 그가 체제에 저항하는 '최초의 변칙자'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마일스는 엄마의 격려를 받고 그웬을 쫓아갈 때 옥상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간다. 그웬을 따라 차원을 넘어간 뒤 뭄바튼 도심으로 한없이 추락하며, 무너지는 다리로 쏜살같이 내려가 공식 설정으로 사망이 예정되어 있었던 싱 경감을 구하는 데 성공했고, 대규모 추격전에서는 사람들을 한 장소로 유도한 뒤 보란 듯이 뛰어내려 아버지를 구하러 간다. 이러한 상승-하강의 구조, 그중에서도 '하강'은 머지않아 상승을 수반하기 때문에 주인공의 성장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며, 설령 그의 행동이 공식 설정에 반하는 행위라 한들 '자신의 삶은 자신이 쓴다'는 마일스의 주체적인 자유주의 사상을 내포한다. 소니 픽처스는 상승-하강을 '몇 번을 떨어져도 다시금 날아오르는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방법론으로써 눈부시게 그려내었다. 1편인 <스뉴유>부터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확고한 주제 의식을 여러 씬에서 살펴볼 수 있다. 마일스의 동료들이 그가 스파이더맨으로서 자격이 충분한지 테스트하는 장면에서 마일스는 초단기 정훈교육을 당하는데, 앞으로 그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 존재, 떨어져야만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존재인 스파이더맨으로서 끝없이 투쟁해야 함을 보여준다. 애런 삼촌의 사망으로 기어이 각성한 마일스는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공포를 딛고 능력을 다룰 수 있게 되는데, 이때 떨어지는 마일스를 화면에 거꾸로 담아내 마치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해당 씬의 각본에는 "The camera is UPSIDE DOWN. Miles isn't falling through frame. He's RISING."라고 적혀있다. 그렇다! 하강과 함께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상승(Rise)은 배트맨과 스파이더맨을 꿰뚫는 본질이다. 이처럼 히어로의 존재 의의를 규정하는 방식의 유사성은 스파이더-버스 트릴로지가 놀란의 배트맨 트릴로지를 다각적으로 참고했음을 알 수 있다. 그거 아는가? 마일스가 미겔을 뿌리치고 달로 올라가는 셔틀 열차에서 뛰어내릴 때, 그웬은 짜릿함을 느끼기라도 한듯 살며시 웃고 있었다.
|모든 소수자를 위한 영화
최근 과도한 PC주의 논란의 정점을 찍은 <인어공주>를 필두로 디즈니가 전방위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만약 그들이 진정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했다면, 소수자 캐릭터를 내세워 사회적 편견을 타파하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진심으로 담고 싶었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다르게 했을 것이다. 디즈니가 팬들의 원성을 사는 이유는 'PC를 넣어서'가 아닌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PC가 원작의 정체성마저 망쳐서'다. 스파이더-버스 트릴로지는 기존의 IP에 PC 요소를 과할 정도로 듬뿍 넣었다. 최초의 흑인 스파이더맨 마일스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히스패닉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모계의 성 '모랄레스'를 따랐으며 선생님에게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서의 굴곡을 담은 스토리를 대학에 어필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는 미국 입시에서 교육의 다양성 보장을 위해 흑인을 비롯한 소수 인종에게 혜택을 주는 소수인종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을 비꼰 장면으로, 최근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려 이 정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작금의 주객전도된 PC주의처럼 처음에는 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도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오히려 소수자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하는가 하면 역차별을 낳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일스의 어머니 리오 모랄레스는 정체성은 스패니쉬지만 엄연한 미국인(푸에르토리코 X발 미국땅이래잖아)이며 아버지 제프 모랄레스(본명은 데이비스이나 아내의 성을 따라 명찰에도 모랄레스를 쓴다)는 곧 경찰 서장으로 진급을 앞둔 브루클린 도심 내 자가 주택 보유자다. 이렇듯 묘사된 바로는 최소 중산층 이상의 가정 환경에서 버젓이 잘살고 있는 마일스인데, 이민자 가정에서 어려운 삶을 겪어온 스토리를 어필하라니! 부모님이 어이없어할 만하다. 위 해당 씬의 스틸컷을 자세히 보면 마일스의 가방에 붙은 BLM 배지까지 찾아볼 수 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른 그웬의 세미 투블럭 숏컷과 눈썹 피어싱은 또 어떤가. 마치 자신을 외적인 모습으로 규정하지 말아 달라는(마스크를 포함하여) 무언의 경고 같다. 그녀의 방에는 'PROTECT TRANS KIDS'라는 문구가 적힌 프라이드 플래그가 붙어있으며 아버지 조지 스테이시는 이를 지지하는 표시로 경찰 제복에 붙이고 다닌다. 이렇게 PC로 가득 점철된 영화가 그웬을 고전적인 히로인으로 소모하지 않는 건 어떤 의미로는 당연하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좀 그만 보라며 오리엔탈리즘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스파이더맨 인디아는 어떤가? 체제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 펑크 록커 스파이더펑크는 또 어떠한가? 이러한 <스어유>의 쏟아지는 PC세례는 별다른 어색함 없이 조화롭게 작품에 스며들었을뿐더러 그 요소 하나하나가 인물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1편 <스뉴유>에서 마일스는 힙한 음악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농담하는 걸 즐기는 자신의 뚜렷한 개성을 버리고 영웅의 익명성과 책임감을 뒤집어쓰는 데 극심한 부담을 느꼈다. 하지만 자신의 취미인 그래피티를 살려 스파이더맨의 슈트를 검게 칠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서사의 빌드업은 큰 공감을 이끌어 관객 역시 흑인 스파이더맨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1편에서 개인의 개성과 영웅의 익명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은 2편에서는 정치적 올바름과 작품의 재미가 공존할 수 있느냐의 고찰로 확대된다. 결국 중요한 건 재미다. 재미가 보장된다면 개연성과 설득력은 부차적인 문제다. 스파이더-버스 트릴로지는 재미를 0순위로 놓치지 않으면서 소수자의 우화를 자연스럽게 녹여내 메시지가 작품에 뒤따르도록 했다. 메시지가 영화를 삼켜버린 최근의 여러 사례와 비교하면 <스어유>의 위대한 성과는 독보적으로 빛난다.
모든 디아스포라(Diaspora)는 필연적으로 소수자다. 그리고 스파이더-버스 트릴로지의 등장인물은 구조적으로 대부분 디아스포라이다. 무려 유색 인종 이민자 가정 출신의 주인공 마일스는 1편 <스뉴유>에서 아버지의 강압으로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엘리트 학교인 비전스 아카데미에 다니며 학우들과 섞이지 못하고 외롭게 지낸다. 마일스는 <스어유>에 와서도 스파이더 소사이어티의 변칙자로 취급받으며,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마일스의 룸메이트 강케 리는 한국계라는 설정으로 방에 손흥민 포스터를 붙이고 있고, 그의 성우는 <엘리멘탈>, <굿 다이노>의 감독 피터 손이다. <업>의 주인공 러셀의 모델이기도 한 피터 손은 한국계 이민자 2세이며 그의 자전적인 스토리를 <엘리멘탈>에 담았다. 이때 디아스포라와 소수자에 관한 은유는 스파이더맨들에게 광역적으로 확장된다. 그들은 모두 자기 지구에서 유일한 존재(One & Only)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고독하며, 다른 차원의 지구에서 이방인이 된다. 넓게 보면 다른 차원에서 넘어왔을 때 발생하는 글리치 현상을 겪는 모든 존재가 디아스포라인 셈이다. <스뉴유>와 <스어유>에는 각각 소수자와 디아스포라의 입장을 대변하며 주제 의식을 통찰하는 대사가 있다. 1편에서 사망한 마일스 세계의 피터 파커 추모식에서 메리 제인은 "우리 모두가 스파이더맨"이란 연설을 남겼으며, 2편 그웬이 마일스의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다 떠난 탑에서 마일스 어머니는 그에게 "누구도 너에게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게 해"라고 말해준다. 마일스는 메리 제인의 연설에 용기를 얻어 스파이더맨의 익명성과 고독을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보편성으로 끌어안을 수 있었고, 자신더러 여기 있어선 안 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일 뿐이라며 윽박지르는 미겔을 향해 어머니의 말을 떠올려 자신의 이야기는 자신이 쓴다며 통쾌하게 되돌려 줄 수 있었다. 특히 어머니 리오 모랄레스의 대사는 여러모로 작품을 관통한다. 어디든 네가 속하지 못할 곳은 없으니 스스로 이방인을 자처해 기죽을 필요 없다는 아들을 향한 어머니로서의 격려이자 스크린 바깥의 모든 소수자를 향한 응원이다. 또한 지구-42의 프라울러 마일스에 관한 복선이기도 하다. 마일스의 어머니는 아들을 앞에 두고서도 굳이 3인칭인 '그 녀석'이라 부르면서 "네가 어딜 가든 그 녀석을 잘 돌봐 달라"라고 당부하는데 이는 지구 42-의 또 다른 나인 그 녀석과 싸우지 않고 협력하게 될 것을 암시한다. 화룡점정은 그웬의 엔딩씬이다. 인트로에서 밴드원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밴드를 그만두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자신만의 밴드를 결성하면서 "결국 나와 맞는 밴드를 못 찾았어.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었지, 오랜 친구들과 함께. 너도 들어올래?(I never found the right band to join, so I started my own. With few old friends. You want in?)"라는 말을 남기며 3편을 기대하게 한다. 1, 2편 내내 반복된 소수자와 이방인을 향한 비유를 한 번에 엮어내면서 후속작까지 이토록 멋지게 예고하다니. 그웬이 끝내 찾지 못한 자신에게 맞는 '밴드'는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집단'이며, 그웬은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소수를 대변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세상의 모든 소수자와 이방인에게 "네가 속하지 못할 곳은 아무 데도 없어"라고 격려하며,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으니 혹시 밴드를 찾지 못했다면 너도 들어올래?"라고 물어보는 영화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후속작의 스토리는?
스파이더-버스 트릴로지의 마침표를 찍는 후속작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이하 스비유)는 2024년 3월 29일 개봉이 예정되어 있다. <스어유> 제작 과정에서 애니메이터들을 착취했다는 내부 폭로가 이어지면서 3편이 예정일에 개봉할 수 없을 거란 루머가 불거졌고, 소니는 이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최고의 명작이 애니메이터의 고혈을 짜내 만들어졌단 사실이 씁쓸한 한편 후속작을 고대하게 만드는 엔딩 덕에 부디 개봉 연기만은 되지 않길 바라는 게 지금의 솔직한 심정이다. <스비유>에 대한 떡밥은 <스어유> 곳곳에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향후 스토리에 대한 암시는 엔딩에서 도드라지는데, 주인공 마일스와 프라울러 마일스, 그웬의 밴드와 미겔의 스파이더 소사이어티가 대척하는 구도를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앞서 언급한 마일스 어머니가 탑에서 했던 대사, '그 녀석'을 잘 돌보라는 말은 두 마일스의 협력 관계를 암시한다. 프라울러가 본래 빌런으로 묘사됐던 점과 달리 지구-42의 마일스는 원래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었으나 주인공 마일스에 의해 미래가 바뀌어 삼촌의 뒤를 잇는 프라울러가 된 것으로, 영웅이 존재하지 않아 치안이 매우 좋지 못한 지구-42의 뉴욕을 수호하는 자경단(vigilante) 역할을 자처한다. 이는 공식 아트북에서 언급된 내용이며, 영화 속 그웬의 설정이 모두 코믹스 <Edge of Spider-Verse Vol. 2>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3편의 프라울러는 선역이 될 가능성이 자명하다. 지구-42의 애런 삼촌을 따라간 마일스가 옥상에서 프라울러에게 맞아 기절하는 장면도 이와 관련된 힌트가 된다. 기절할 정도로 머리를 세게 맞았는데 마일스의 스파이더 센스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라울러 마일스는 성우 또한 마일스와 다른데, 보편적인 미국 흑인 영어를 구사하는 마일스는 셔메이크 무어가 연기하며, 아버지가 없어 히스패닉인 어머니의 말투에 영향을 받은 프라울러 마일스는 도미니칸계 미국인 자렐 제롬이 연기한다. “새 스파이더맨이 푸에르토리코 출신이라더라”는 어머니의 말에 “음…제 생각엔 도미니칸 같아 보이던데요?”라며 받아치는 점도 직접적인 복선인 것. 전작 <스뉴유>에서 마일스가 피터 B. 파커를 애런 삼촌 집의 샌드백에 묶어놓고 심문했듯 지구-42의 마일스도 역으로 똑같은 일을 겪는데, 피터 B. 파커는 마일스의 멘토가 되어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기에 두 마일스도 이내 서로 마음을 열고 상생할 것으로 보인다. 마일스는 1편에서 피터 B. 파커의 조언대로 눈 대신 손을 보는 습관을 들인 바가 있으며 프라울러 마일스와 대면 후 몇 마디를 나눠보더니 대화가 통할 눈빛이 아니란 걸 알았는지 눈을 마주치는 대신 그의 손을 좌우로 번갈아 주시한다. 곧이어 마일스의 손에 전기가 일렁이며 영화는 끝이 난다. 마일스가 일단은 무력을 사용할 것으로 예상되나 어떤 기지로 상황을 풀어나갈지 기대를 모은다. J. 조나 제임슨 역을 맡은 J.K. 시몬스의 목소리를 통해 지구-42에 범죄 카르텔 '시니스터 식스'가 활개치고 있다는 것이 언급되었으므로, 마일스가 프라울러 마일스를 도와 시니스터 식스를 물리치면 그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유대를 쌓고 프라울러 마일스가 이에 화답하는 방식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두 마일스가 우호적인 관계를 쌓을 동안 제프 모랄레스의 죽음을 막으려는 그웬과 캐논 이벤트를 수행하려는 미겔이 충돌할 것으로 추측한다. 그웬과 미겔의 대립은 의도는 선하나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두 밴드(집단)을 매개로 확장될 것인데, 미겔은 영화에 담긴 가족 서사의 맥락으로 보면 마일스가 넘어서야 할 또 다른 아버지와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결정적인 순간에 마일스가 미겔과 다시 대면하여 자신의 성장을 증명하는 장면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네가 있으면 안 되는 곳은 없다"는 어머니의 격려와 "너는 여기 있어선 안 될 존재"라는 미겔의 대사는 정면으로 부딪친다. 미겔은 달로 올라가는 셔틀 열차에서 "넌 네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꼬마에 불과하다"라며 일갈했었고, 마일스는 "한 명도 구하고 모두도 구하는 것이 스파이더맨"이라며 열변을 토한 적이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고 스파이더-버스 전체도 구해 소년 성장 서사로서의 아버지 미겔에게 한낱 꼬마가 아닌 스파이더맨으로서 인정받게 되는 전개를 짐작할 수 있다. 모두를 구하고 나면, 마일스의 아버지는 스파이더맨의 충고대로 아들이 날개를 펴도록 도와주고, 마일스는 자신의 바람대로 정든 브루클린을 떠나 뉴저지의 대학에 입학하게 되지 않을까.
마일스와 그웬이 윌리엄스버그 은행 옥상에 거꾸로 앉아 대화를 나눌 때 <스파이더맨(2002)>의 토비 맥과이어와 커스틴 던스트의 거꾸로 키스씬을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이미 전작에서 이를 오마주한 거꾸로 키스씬이 두 차례나 짧게 지나간 바 있기 때문에, 3편에서 마일스와 그웬도 비슷한 장면을 연출할 거라 90%쯤 확신한다. <스어유>의 시계탑 씬처럼 두 명 다 거꾸로 매달린 상태의 새로운 키스신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한다. 그웬은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이며 마일스는 캐논 이벤트를 부수며 탄생한 '캐논 이벤트 브레이커'기에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처럼 그웬이 비극적으로 사망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일스가 2명 등장한 이상 3명, 4명 그 이상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고, 마찬가지로 여러 멀티버스의 그웬이 나타나 서로 돕는 장면도 충분히 그려봄직 하다. 그웬 밴드는 마일스의 아버지가 죽는 캐논 이벤트를 두고 미겔과 대립할 텐데, 그들 사이의 대립은 초월적인 존재로 등극한 스팟의 위험성을 고려하면 아주 사소한 갈등이지 않나 싶다. 스팟은 수많은 스파이더맨이 존재하는 멀티버스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존재이자 그 총집합을 뜻한다. 여러 색을 계속 섞으면 스팟의 검은색이 나온다. 스팟은 곧 세계관을 파멸로 이끌 존재이기에 결국 작중 모든 스파이디가 일치단결하여 스팟을 막아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자가 나오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다. 스팟이 너무 대놓고 살인 예고를 한 제프 모랄레스보다 오히려 미겔이나 피터 B. 파커가 대신 희생을 치르진 않을까 우려된다. 스팟은 개그캐에 가까웠던 초반부터 마일스에게 자신이 그의 숙적(nemesis)이라며 흡사 배트맨과 조커의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연상케 하는 섬뜩한 말들을 내뿜었고, 자신의 구멍(spot)을 저주로 여기던 그는 "내 가슴에 뚫린 큰 구멍을 메꾸는 방법은 더 많은 구멍을 내는 것이다"라며 차원 이동기를 흡수해 몸 전체가 큰 구멍이 되어버렸다. 이 둘이 정녕 배트맨과 조커 같은 동전의 양면성을 지닌 관계라면, 한 명의 변칙자에 불과한 마일스 역시 더 많은 변칙점을 만들어 스파이더-버스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것이라 본다. 최초의 변칙자이자 캐논 이벤트 브레이커로서 다른 모든 스파이더맨이 겪을 불행한 일들을 교정해주는 새로운 리더에 등극하는 흐름이 적절하지 않을까. <스뉴유>의 빌런 킹핀처럼 이미 발생한 과거의 사건을 되돌리려는 과욕은 모두의 불행을 초래하지만, 마일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예견된 불행을 막는 데에 늘 최선을 다한다. 그의 진심이 닿아 전작에서 내내 삶을 포기하려 했던 피터 B. 파커는 용기를 내 메리 제인에게 청혼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었고, 모든 멀티버스의 그웬과 스파이더맨의 사랑은 불행으로 끝난다는 그웬의 말에 "언제나 처음은 있는 법"이라며 자신의 자유의지를 능청스레 드러낸다. 이 대사는 마일스라는 캐릭터를 넘어 스파이더-버스 트릴로지의 표상이다. 3편 <스비유>에서 그가 최초의 흑인 스파이더맨으로서 공식 설정을 보기 좋게 깨부수고 사랑과 학업, 진로까지 빼놓지 않고 전부 쟁취할 미래를 기대해 본다.